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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1-09-28 00:00
[불교어록방] 구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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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 참된 모습 고라는 개념은, 주체를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설명의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헌데 붇다는 ‘무상한 것은 고’라고 하며, 무상의 존재론을 주체와 관련시켜서, 이행고성이라는 ‘고’를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러한 존재론이 주체의 문제로 바뀌어, 그것이 ’고‘로 인지가 된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일이 되겠는가. 이 일에 관하여 앞서 지적을 하고자 하는 것은, 붇다가 얘기한 고는 이미사색의 경로를 거치었다는 사실이다.최소한 그것은, 고고성의 그것과 같이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느 경전에서는 젊고 부귀 속에 있었던 고타마를 인도하여 출가하게 한 동기에 대해서 뒷날 붇다가 술회하는 양식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구니들이여, 나는 괴로움이 없었고, 조금도 괴로움이 없었으며 마침내 괴로움 없이 살았느니라. 비구니들이여, 나의 부친 거처엔 연못이 만들어졌다. 비구들이여, 다만 나를 위해 한쪽에는 청련이 심어지고 한쪽에는 홍련이 심어졌으며, 또 한 쪽에는 백련이 심어졌느니라.” 이렇게 말을 시작한 붇다는, 출가하기 전의 생활이 얼마나 즐거웠으며, 괴로움이 없는 그것이었던가를 매우 자세하게 의식주를 거쳐서 얘기해나갔다. 그러나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으니. 스스로가 괴로움을 지니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소견이었다는 말씀이었다. “비구니들이여, 나는 이처럼 풍요로웠으며, 또 마침내 이처럼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기를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노쇠해갈 몸이며 채 노쇠의 운명을 면하지 못했으면서 노쇠한 남의 모양을 보고 외면하며, 자신의 처지를 잊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한다. 나 또한 노쇠할 것이며, 채 노쇠의 운명을 면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노쇠한 타인을 보고 부끄러이 알고 싫어함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내가 이렇게 살피었을 적에 모든 장년기에 있는 장년의 교만함은 남김없이 끊어졌었다.” 그리고 붇다는 다시 병에 대해. 또 죽음에 대해서도 같은 사유를 반복했음을 알리고, 이리하여 부모가 통곡하는 가운데 삭발을 하고 가사를 걸치고, 집을 나와 사문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회고는 본디 붇다가 제자들에게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생명의 교만을 경계하게 하고자 말씀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스스로 붇다의 출가에 이르기까지의 심적 과정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심적 과정은 분명히 ‘어리석은 범부’가 깨닫지 못한 채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날카로운 통찰에 의해 그 진상을 드러내기에 다달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붇다가 말하는 ‘고’가 이미 사색의 과정을 거친 그것이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는, 괴로움이란 눈에 뜨이지 않는 듯한 나의 생활도 우연한 기회에 짚이는 바가 있어서 골똘히 생각해보았더니 실제병사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두 어깨에 걸머진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 젊음의 긍지와 건강에 대한 자신과 생명의 교만이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붇다가 말하는 ‘고’는 그런 것이었다. 이 무상한 존재 속에 인간도 또한 그 존재의 일부로서 무상의 운명아래 놓여 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원할 지라도 언제까지나 젊고 건강하게 살아 있을 수 없다. 인간은 글자 그대로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을 빌린다면, 그는 이미 ‘행복한 돼지’가 아니라,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되어 있는 것이겠다. 또한 파스칼의 <광세>의 말을 인용한다면, ‘나무는 자신이 불행한 줄을 모르면 폐가도 자신의 불행을 알지 못한다. 불행한 것은 인간뿐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며, 그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그가 위대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하는 이것이 그때 붇다가 놓여 있는 생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고’는 현대인의 말로 표현한다면 오히려‘불안’이라는 개념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고’라는 말은 더 직접적인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배고픈 것은 괴롭다. 목이 마름도 괴로운 것이다. 덥고 추운 것도 괴롭다. 그러한 것들은 앞에서 고고성의 범주에 드는 것이어서 문자 그대로 ‘고’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는 가는이 괴롭고, 병듦이 괴롭다고 할 때 그도 또한 여기에 속함은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인간인 바에는, 언젠가는 병들고 늙지 않을 수 없다는 일, 또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일이 예상되는 까닭에 그 피할 길 없는 운명 앞에 몸서리친다는 것, 그것은 현대의 언어로 표현될 때 바로 불안의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불안에 관해, 예부터 사람들이 생각한 것은 여러 가지였다, 구약의 ‘이사야’22장 13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을 수 있다. “너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와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고 하는 구나.” 이스라엘의 백성들로서는 장차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을 오늘의 향락에 의해 도피할 수 밖엔 없었던 것인지. 또한 그리스의 사상가 가운데에서는 교묘한 논리를 가지고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자 한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있으면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죽음이 다다르는 순간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고대 그리스의 향락주의의 대표자인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허나 어떤 향락이나 궤변을 가지고서도, 이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 할 것이다. 붇다는 젊었을 당시 그런 불안에 당면한 이래 그 문제와 정면대결을 해나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 문제로부터 눈을 돌린다든가 등을 돌려 도피하든가는 하지 않았다. 혹은 향락이나 궤변으로써 잠시일지라도 그것을 잊고자 시도하지도 않았다. 붇다는 오히려 그 위에 눈물을 한없이 내리면서도 그 불안에 대해 정면대결을 했다. 그것이 바로 그 출가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그리 쉬울 턱이 없었다. 7년의 세월은 헛되이 흘러만갔다 . 그가 그 문을 두들긴 여러 도인들의 학설도, 이 문제의 해결에는 별 다른 보탬이 되질 못했다. 갖은 고행도 도움이 되질 못했다. 그것은 마치 해결할 길 없는 문제에서 해결을 끄집어내려는 노력인 듯 했다. 그러나 드디어 서광이 비쳤다. 저 보리수 아래서 결가부좌한 지 며칠만이 었는가. 동쪽 하늘에 샛별이 반짝일 때쯤 붇다의 가슴엔 새로운 존재론의 암시가 나타났다. 그것이 곧 ‘깨달음’이었으며 그 안의 것을 이야기하자면 그것이 ‘연기’의 이론이었던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것만한 조건이 있으므로 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 조건이 소멸하게 될 때 그 존재는 없어지게 된다는 이것이 그가 깨달은 근본사상이었다. 만일 그렇다 하면, 이런 불안, 즉 고도 또한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을 한 경에서는 “고는 연생(緣生)이다”라고 표현했다. 또 한 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비구니들이여, 고는 유연(有緣)이며 무연(無緣)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무연(anupanisam)’이란 무조건의 뜻이다. 만일 고가 무조건이고 적대적인 것이라면 어떤 노력도 그것을 극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엇 하나도 무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는 거, 그것이 붇다가 깨달을 존재론의 근본이었다. 그렇다면 고도 역시 유연(sa-upanisam)임이 분명하다. 조건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며, 조건이 제거된다며 소멸 할 수밖에 없다. 결코 무조건, 무제약적인 것은 아니다. 생각이 여기에 다다랐을 때 붇다는 쾌거를 울렸던 것이다.‘고는 연생’이라고, 얼핏 보기엔 ‘고는 연생이다.’라는 구절은 참으로 무미건조한 듯이도 생각될 것이다. 허나 잘 살펴보면 이 한마디 말의 배경에는 출가 후 7년 세월에 걸친 피나는 정진, 추구의 역사가 매어 있음을 알게된다 “벗이여, 고는 연생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소.” 붇다의 제자들이 이런 말을 주고받은 그 속에도, 또한 한없는 감개함이 서렸을 것이라 감지된다. 연생(paticcasamuppanna)이란, ‘조건이 있으므로 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가 연생이라 함은, 그 조건을 없애는 것에 말미암아 그것이 극복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고를 성립시키고 있는 조건을 이해하는 일이며, 그 조건을 없애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는 일이다. 한 경은 앞에서 나온 외도 사상가 잔푸카다카와 붇다의 제자인 사리풋타의 문답을 기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벗 사리풋타여, 무슨 이익이 있기에 사문 고타마를 따라 성스러운 삶을 여위 하는가.” “벗이여 고를 해결하고자 세존을 따라 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고를 해결하는 길이 있는가. 그 목적에 닿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벗이여 이 고를 해결할 길이 있다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벗이여 이 고를 해결하는 길이란 어떤 것인가.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하여 사리풋타는 그 외도 사상가를 위해 이른바‘팔정도’에 대해 설명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하거니와 어쨌든 붇다는 이렇게 하여 ‘고’의 진상을 간파함으로써 그것을 이룬 조건을 캐고 그 조건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해낸 다음, ‘너희들도 오라.’고 우리들을 향해 손짓하여 부르고 있는 바이다. 한경이서는 이때의 붇다에 대해 “참으로 나는 모든 것에 이겼노라. 아무도 캐내지 못하던 고의 뿌리를 나는 비로소 파헤쳐 캐냈노라“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불기 2545년 9월 28일 [세계불교일붕법왕종 총무부원장 구천스님]